번역  


올 시즌의 첫 무대였던 <SA>의 여싱 첫날 SP 경기가 끝나고 나서... 필자는 너무나도 강렬했던 <죽음의 무도>의 여운을 만끽하면서, 이어질 FS 프로그램 <세헤라자데>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고무되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원곡(原曲)은 이제 승냥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러시아의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 (Rimskii Korsakov)>의 4악
         장 관현악곡이고... 너무나도 유명한 <천일야화(千一夜話)>가 그 소재이며... 프랑스에서는 이 원곡을 배경으로 하
         여 발레극이 만들어져, 열광적인 안무와 화려한 무대 디자인으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연아> 선수가 컴페티션의 현역 선수 생활을 하는 가운데 한 시즌은 꼭, 이 <세헤라자데>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비록 피겨팬들 사이에서는 소위 사골곡(?)으로 지칭되곤 하는 대표적인 곡들 중 하나이지만... 워낙에 <세헤라자데>라는 캐릭터가, 피겨 여왕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아이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시기였다. 이 곡을 들고 나올 타이밍이 중요했던 것이다. 어설픈 상황에서 사용했다가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향후의 내용에서 차차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  <미셸 콴>의 2002년 프로그램은... 부드러운 스케이트 스킬, 음악과 어우러지는 뮤지컬리티, 객석과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감정 표현 등 그야말로 그녀의 장점들이 충만한 명작이었다. 하지만... 필자의 관점에서는, 이 작품은
         결코 100점 짜리의 <세헤라자데>가 될 수 없었다.

         우선 배경 음악의 편곡에서부터 좀 더 손을 볼 여지가 남아 있었고... 열정, 호소, 환희 등의 감정과 함께 <콴>이 표
         현하는 <세헤라자데>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딘지 헐리우드적인 색채가 자꾸 배어나와서, 필자
         가 익히 알고 있는 "아라비안 나이트 속의 <세헤라자데>" 라고 하기에는 적지 않은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 끝난 직후에 남는 느낌은 역시... <세헤라자데>라고 하기보다는 <아메리칸 히로인>이라고나 할까? 그
         러나... 그렇다고 해서, <콴>의 이 명작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기술성과 예술성이 어우러진 한 편의
         피겨 작품으로서, <콴>의 <세헤라자데>는 완벽에 가깝다. 다만... 아라비아의 여왕이라고 하기에는, 적어도 필자에
         게는... 어딘지 좀 어색한(?) <세헤라자데>였다는, 그런 정도의 느낌일 따름이다. (^^)

         그리고, 간혹 언급되기도 하는 <안도 미키>의 2006년 프로그램은... 기본기에서부터, 우리 여왕님의 연기와 비교한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기에... 굳이 설명할 필요성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라비안 나이트> 혹은<천일야화>... 들어본 적조차 없다는 사람은, 아마도 이 자리엔 한 분도 안 계실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유명하기에 결코 모르는 것은 아닌데, 어느 정도나 자세히 알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실 분들도 아마 상당수 계시리라 생각한다. (^^) 하지만, 뭐... 그다지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었다고 해도 대부분 어린 시절의 일이었을 것이고, 워낙에 많은 얘기가 실려 있는 책인지라 그 내용이 모두 다 일일이 기억날 가능성 또한 별로 없지 않겠는가. (^^)

따라서... 일단은 <천일야화>에 대한 기본 지식을 복원시키는 것으로부터 이 감상문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죽음의 무도>에서와는 달리, <세헤라자데>는 그 인물 자체가 바로 <연아> 선수의 배역이므로...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세헤라자데>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이리저리 따져가며 꼼꼼하게 한번 분석을 해 볼 필요가 있겠기 때문이다.


■  천일야화 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 (영역으로는, 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 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6세기 사산조 페르시아 시절부터 전승된 중동의 구비 설화들을 15세기 경에 이르러 집대성한 중동 지역 아랍어 고전의 대표작으로... 주요 이야기가 180 여편, 여기에 짧은 이야기 100 여편이 더해져 무려 280 여편이 넘는 이야기로 구성된 장편 설화집이다. (작자는 전부 미상이다. 각각의 설화는 물론, 누가 이것을 한 편의 이야기로 재구성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에는, 일곱 번씩이나 인도양에 나아가 갖가지 위난을 극복한 끝에 바그다드의 대부호가 되는 장사꾼의 모험을 그린 <바다의 신밧드 이야기>도 들어 있으며, 이 이야기는 지금도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소재로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1703년, 프랑스의 A.갈랑이 불역판(佛譯版)을 낸 이후 전세계로 퍼졌고... 이후, 세계 각국의 문학자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민중에게 끝없는 흥미와 꿈을 심어주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불역판을 내던 당시, 갈랑은 원본인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없었던 <알라딘과 요술 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
         둑> 등의 이야기도 함께 번역하여, 임의로 여기에 삽입했다고 한다. 즉, 너무나도 유명한 저 2편의 이야기가 정작
         원본에는 없고 번역판에만 실려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저 2편의 이야기 또한 중동지역의 구비전승설화라는 것은 틀
         림없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어린 시절, <아라비안 나이트>의 또다른 별칭인 <천일야화>의 의미를 "千日(1000일)夜話(밤의
         이야기)" 로 오랫동안 오해하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진실은 <千一夜話> (영역하면, The Book of One Thousand
         and One Nights) ... 즉 "천하룻밤의 이야기" 였던 것이다. 필자가 이 사실을 바르게 알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된 이
         후였다. (^^a;;)


이야기의 중심인 페르시아는 무역이 매우 번창했기에, 전세계의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자신들 나라의 신기한 이야기들로 늘상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따라서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중동지역뿐 아니라... 인도와 이집트, 유대와 그리스, 심지어 이베리아 반도와 중국을 무대로 삼는 이야기까지 들어가 있다. (여기에, 설화의 배경 또한 실재의 역사와 가공의 세계가 마구 뒤섞여 있다.) 다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아랍어와 이슬람 사상으로 재해석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다양한 지역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말고도, <아라비안 나이트>는 매우 독특한 서사 구조를 지닌 것으로도 흥미를 끈다. 280 편이 넘는 이 많은 이야기들이, 작품 속에서 단 한 사람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라비안 나이트>의 유일한 나레이터가... 바로 <세헤라자데>이다.

무려 천하룻밤 동안이나 이야기를 계속해야만 했던 그녀... 이야기 속에서 <세헤라자데>는 수많은 설화들을 머리 속에서 정리하여 듣는 이가 흥미를 잃지 않도록 이야기의 순서를 정하고, 각 이야기 속에 담긴 교훈들을 자연스럽게 부각시키기도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 속에서 <세헤라자데>는,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흥미롭고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천일야화> 속의 <세헤라자데>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는, 페르시아로부터 인도까지의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는 대왕 <샤리야르> 시대의 궁중비화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이 왕국은 가상의 왕국이 되겠다.)


    ☞  <샤리야르>와 <세헤라자데>의 정확한 원어 발음이 무엇인지는, 필자도 알지 못한다. 영어식 발음 표기로 <샤리
         에>와 <세라자드>라 쓰여진 번역서를 본 기억도 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세헤라자데>라는 발음에 너무 익숙해진
         상태이므로... 이 글에서는, 구색(?)을 맞춰 <샤리야르>라 적기로 하겠다.


어느날, 제국 일부를 다스리고 있던 소군주인 동생과의 대화 도중에... <샤리야르> 왕은 자신의 아내인 왕비가 난행(亂行)을 일삼고 있다는 얘기를 우연히 전해 듣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왕은, 왕비가 자신 몰래 노예와 부정(不貞)을 저지르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다. 이에 왕은 현장에서 두 사람을 죽여 이를 응징했으나, 머리 끝까지 치민 분노는 그것만으로 풀리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혐오에 빠져버린 왕은, 마침내 광기 어린 복수극을 시작한다.

아름다운 젊은 여성과 혼인을 하여 새왕비로 삼은 뒤, 하룻밤을 보낸 다음 이튿날 아침에 처형을 하는 피의 유희. (여성에 대한 불신과 혐오도 있었겠으나... 한 나라의 지존인 왕으로서 자신의 여자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이다. 따라서, 결국 <샤리야르>가 벌인 일은 자기 치유를 위한 행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만을 보호하려는 절대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파괴를 저지를 수 있는가 하는 예시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거리에서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점차 사라져 갔다. 백성들은 악마로 변해버린 왕의 처사에 치를 떨면서도 공포에 숨을 죽였고, 그럴만한 나이의 딸을 둔 부모들은 행여 사람들의 눈에 띌세라 숨길 방법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이 때, 이러한 왕의 광기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이가 나타났다. 왕의 대신(大臣) 가운데 한 사람의 딸인 <세헤라자데> 였다.

무모하다고 말리는 부모님의 만류마저 뿌리치고, <세헤라자데>는 스스로 왕과 혼인을 한다. 드디어 맞이하게 된 첫날밤... 그녀는 왕과 단 둘이 있게 된 자리에, 여동생 <두냐자데>를 불러들인다. (혼인을 하면서 <세헤라자데>는 여동생과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청을 했고, 왕은 어차피 하루살이 운명일(?) 새왕비의 청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두냐자데>는, 왕에게 언니의 얘기 솜씨 자랑을 늘어놓으며 그녀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달라고 조르기 시작하고 <세헤라자데>는 동생에게 왕 앞에서의 무례를 나무라며 살며시 사양을 한다.

오랫동안, 첫날밤을 맞을 때마다 예외없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여성만을 보아 왔던 왕이었다. 그러한 연약한 여성상에 자신을 배신했던 전 왕비의 실루엣이 겹쳐지면,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스스로 자기 파괴를 계속했던 왕이기도 했다. 그러했던 <샤리야르>에게, <세헤라자데>와 <두냐자데>의 행동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호기심이 발동한 왕은 <세헤라자데>에게 이야기를 해 보라고 허락을 한다. 이에 못 이기는 척 하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하는 <세헤라자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은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얘기는, 세상에 떠도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결코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는, 그녀 자신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억울한 자에 대한 동정, 무지한 자에 대한 연민, 현명한 자에 대한 존경, 용기있는 자에 대한 찬사... 그랬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세상사인 것이지만, 그녀가 들려주고 있는 것의 실체는 사람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원래 뛰어난 군주였던 <샤리야르>는, 그녀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본심~" 이 반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야기에 푹 빠진 왕은, 미처 날이 밝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세헤라자데>는 말을 멈추었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가 막 클라이막스로 전개되어 나갈 참이었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던 왕은 <세헤라자데>의 처형을 명령하기는 커녕, 그날 밤에 남은 얘기를 마저 듣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수년 동안 이어져 온 왕의 악행이... 불과 단 하루뿐일지는 몰라도, 마침내 멈추게 된 날이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왕에게 들려주는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무려 천하룻밤 동안이나 계속된다. 약 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진심이 담긴 그녀의 세상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대화를 하고 때로는 의견을 나누기도 하면서... 왕은, 비로소 자신을 변하게 만든 악마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전 왕비의 탓이요,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여자들 탓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핑계에 불과하다. 진범은 결국, 약하디 약한 자신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샤리야르> 왕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세헤라자데>와 다시 한번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뒤 정식으로 새왕비로 삼는다는 포고를 내린다. 그리고 이 후, 두 사람은 3 명의 왕자를 낳고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두냐자데> 또한, 왕의 동생과 혼인을 하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  하지만, 백성들로서는 새삼스러울 것이 전혀 없는 일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세헤라자데>는, 백성들의 마음 속에
         이미 진정한 왕비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피의 유희가 멈춰지고 낮이면 정사에 힘쓰는 왕의 모습이
         돌아온 것도, 벌써 3년 전부터의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왕을 지난날의 현명한 군주로 되돌린 이가 누구인지...
         사람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줄거리에서 보여지듯이, <세헤라자데>는 "중세 아랍 세계의 대표적인 현명한 여성~" 을 상징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그녀는... 아름다우면서도 용기가 있고, 신중하고 사려 깊으면서도 사람을 끄는 말솜씨를 지녔으며, 지혜롭고 현명하면서도 매우 겸손한 성품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뭐, 좋은 건 모두 갖추었다는 얘기가 되겠다.)

얼핏 보면 전형적 인물의 범주에 속하기에, 혹자들은... 왕을 자신의 이야기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동생과 공모한 지혜에 감탄하거나, 젊은 여성의 학살을 막기 위해 일신의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또 한번... 필자의 개똥철학(?)이 발동하는 시간이 되겠다. 이전 편의 글인 <죽음의 무도>에서도 부탁드렸다시피... 부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저 재미삼아 다음 글을 읽어 주시길 바란다. (사실, 이미 앞선 글의 내용에도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다소간은 포함되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기로 한다.)

 

■  필자의 주관적인 <세헤라자데> 캐릭터 분석


(1) <세헤라자데>는 대략 몇 살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 시절에는 여성의 가장 꽃나운 나이를 만 14~16 세 시절이라고 했다. (로미오와 사랑에 빠지는 줄리엣도 그네들 나이로 14 세였고, 우리도 예로부터 이팔방년(二八芳年)이라 하여 16세를 꽃다운 나이로 보았다.) 그러니, 대국의 왕인 <샤리야르> 또한 이 연령 때의 여성을 골라 새왕비로 삼았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가 있다.

<세헤라자데>의 경우는 여동생도 있다고 했으니, 대략 15~16세 정도에 궁으로 들어갔을 것 같다. 그렇다면, 대략 3 년 남짓인 천 하룻밤 동안의 이야기를 마친 시점에서는 18~19 세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16세 정도의 소녀가 그토록 현명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저 당시라면, 그럴 수도 있다~" 가 되겠다.

현대의 학교 교육은 커리큘럼이 매우 다양하다. 지식의 양이 방대해졌기에 상식의 수준도 크게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 훈련 시간은 도리어 매우 줄어들었다. 학원 교육, TV 방송 등의 범람으로 주체적인 사고보다는 수동적인 주입이 일상화가 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저 시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책을 읽으며 혼자 생각하고, 깊고 오랜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만이 공부의 방법이었다. 더구나, 강대국에 태어났으니 외국어를 배울 필요도 없고 장인이나 장사치가 아니니 잡학(?)을 배울 필요도 없다. (즉 영어, 수학, 과학 등의 공부는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셈이다.) 무역이 활발한 나라의 대신(大臣) 딸이었으니, 집에서 이국적인 풍물도 많이 접했을 것이고 당시 양가집의 교양에 따라 악기 연주와 가무 또한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익혔을 것이다. (교양은 기본일 테고...) 즉, 인문학이나 예악 등에 집중했을 것이요 견문도 상당수준 쌓을 수 있었으리라는 얘기가 되겠다.

즉, 현명해질 수 있는 기본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셈이다. (게다가 예쁜 것도 타고 났단다.) 나머지는 본인의 노력인데... 말솜씨가 좋았다는 걸로 봐서는, 독서량도 제법 많았을 것이고 개인 교습 등을 통해 대화법도 익혔던 모양이다. 이러고 보면, 그 나이답지 않은 현명함이란 것도...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보여진다.


(2) <세헤라자데>는 왜 자진해서 <샤리야르> 왕과 결혼을 했을까?


필자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고전 읽기 문제집> 이란 게 있었는데, 본책을 읽고 나서 그 내용을 다시 문제 형식으로 풀어볼 수 있는 문제집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책에는 위와 같은 질문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애국심 때문에~" ... 뭐, 꼭 이런 얘기가 답으로 나와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도... 뭔가 좀 이상하다는, 앙금 같은 느낌이 남곤 했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필자에게 떠오르는 해답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세헤라자데>는 <샤리야르> 왕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숨어 있다가 잡혀간 것도 아니고 자진해서 간 것이다. 제 발로 걸어간 목적이 폭군을 암살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좋게 말하자면 깊게 패인 왕의 상처를 치유해 주려고 간 것이요, 우스갯소리로 하자면... 넋 나가 미친 왕, 정신줄 바로 잡아주려고 간 셈이다. (^^) 그것도 완전히 겁도 없이~, 목숨을 턱~ 걸고서 말이다.

물론, 마음 한 구석에는 왕의 악행을 멈춰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을 수야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건 전혀 부수적인 이유 밖에 안된다. 대신의 딸이니, 왕과 일면식도 없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더구나, 전왕비 때문에 돌아버리기(?) 전까지는 넓은 영토의 강대국을 다스리던 명군(明君)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본모습은, 늠름하고 멋진 왕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


(3) <세헤라자데>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를 했을까?


사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이 대목이 될 것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 내기가 아닌가. 다행스러운 것은, 왕의 분노가 젊은 여성들에게만 향하고 있을 뿐... 완전히 정신줄을 다 놓은 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대개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형식으로 출판된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는, 위의 개략적인 소개글에서도 썼듯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 부분을 교묘하게 통틀 무렵에 맞추어 왕의 호기심을 이어갔다~" 라고 쓰고 있지만... 설마,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얘기를 믿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 자, 지금부터의 내용은 15세 미만에겐 조~금 야한데... 뭐, 그래도 심각한 내용은 아니니까 일단 적어보도록 하겠다. (심하다 싶으시면 댓글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동화판이 아닌 원판본 <아라비안 나이트>는, 어디까지나 어른들을 위한 책이었다. 따라서, 상당히 야한 내용들도 많이 포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주 내용은 교훈적이고 모험적인 것들이다. 여기에 양념이 좀 섞여 있었던 것이다.) <세헤라자데> 또한 결코 이야기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첫날은 단순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어떤 날은 마치 혼자 연극을 하듯 얘기하기도 하고, 다른 날은 여동생과 2인극을 하기도 했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으며, 때로는 소녀처럼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때로는 매혹적인 여성이 되어 왕을 유혹하기도 하였다.

다만... 차츰차츰 왕과 정이 쌓여 가는 과정에서도 <세헤라자데>는, 정식으로 왕비가 될 때까지 끝내 왕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허락하지는 않았다. <신드바드>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늘어 놓으며 살짝 은밀한 얘기를 섞어 왕을 설레게 한 후에도, 가벼운 키스만을 건네고는 다음 이야기로 전개해 나가곤 했던 것이다.

즉 <세헤라자데>는, 사실 1001 일 밤의 이야기를 통해서... 실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샤리야르> 왕에게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재기발랄함 뿐 아니라, 그녀의 진심과 사랑까지도 말이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왕에게 요구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한 가지를 가지고 싶다면... 당신의 믿음을, 내게 달라고 말이다.


(4) <샤리야르> 왕은 왜 <세헤라자데>를 죽이지 못했을까?


왕이 느꼈던 배신감의 가장 큰 부분은... 자신이 사랑했던 전왕비가, 자신을 인간으로서 사랑했던 게 아니라 자신에게 복종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왕이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당연히 그것을 일반화시켜 버렸던 점이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거기에 권위적인 폭력을 더한 것이다.

신뢰가 깨져 생긴 상처는, 새로운 신뢰관계를 구축함으로써만 치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사이의 신뢰관계란, 기본적으로 상호작용이 가능해야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왕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떠는 어린 소녀들을 향해 "너 또한 나에게 복종할 뿐이겠지?" 라며 죽음을 내린 것이다. 참, 답도 없는 세월이었다고 할 것이다.

<세헤라자데> 또한, 왕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면... 쉽사리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분노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난 후... <세헤라자데>가 궁에 들어간 시점에는, 아마도 왕의 가슴 속에서 슬픔과 분노, 후회가 마구 교차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녀가 왕의 마음에 파고들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워낙에 저질러 놓은 일이 있어서... 새왕비로 들어오는 소녀들마다 새파랗게 질려 있으니, 왕으로서도 짜증만 자꾸 쌓여 갔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어느날... 자신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소녀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응? 이건 뭥미? (^^)

다른 생각은 모두 차치해 두고서... 일단 왕이 받은 첫 느낌은 "신기하다~" 가 아니었을까? 당연히 소녀의 정체가 궁금해졌을 것이다. (대신의 딸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알고 싶지 않았겠는가?) 뭔가 들려주겠다고 하는데, 들어보니 그거 듣는 재미가 또 쏠쏠하다. (하긴 그 동안 그 많은 피보라를 뿌렸으니, 한동안 왕 주위에 젊은 여성이라곤 얼씬이나 했겠는가? 다 늙어빠진 꼬부랑 할머니들 뿐이었겠지...)

실제로 왕의 입장에서는 <세헤라자데>를 첫날 죽이지 않은 순간부터, 이 소녀를 죽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왜냐? 그녀가 아니고서는, 소통을 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이야기를 섞게 되고...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는 둘 만의 기억, 둘 만의 비밀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 자체가... 아주 작지만 새로운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나머지 3 년은, 치유 받기 시작한 왕의 마음이 완치되기까지의 시간이었을 뿐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샤리야르> 왕이 원한 것은 진실한 사랑과 영원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세헤라자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 그녀 자신이 원하고 있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  <피겨 스케이팅>으로의 재해석


필자가, "여왕님이 <세헤라자데>를 하면, 최고일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이상에서 설명했던 내용들이, 필자가 가지고 있는 <세헤라자데>의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  <미셸 콴>은 <세헤라자데> 시절, 이미 22 살이었다.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세헤라자
         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도 미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녀에서 숙녀로 막 넘어가는 나이의 순수함과 매혹적인 매력을 함께 갖추고 있는 소녀... 사랑에 대한 열정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현명한 소녀...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부터가 딱 여왕님이 아닌가? 다만, 문제는 역시 여왕님의 피겨 실력이었다.

필자의 머리 속에서 <세헤라자데>는 오직 하나, "챔피언 프로그램~" 이라는 이미지 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완전한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너무나도 아쉬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직히... 지난 시즌까지는 <세헤라자데>를 사용하기에 조금 무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니어 2 년차라면... 아직은 좀 위험하다~ 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올 시즌 여왕님의 FS 곡으로 <세헤라자데>가 결정되었을 때, 처음에는 조금 빠른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미셸 콴>도 올림픽 시즌에 이 곡을 썼기에 내년 시즌에 사용하기도 조금 부담이 되긴 하겠구나 싶었고, 무엇보다 여왕님이 직접 이 곡을 선택했다는 얘기에 100 % 믿고 따라가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이다.

우리 여왕님... 나이는 어려도 생각 하나는 야무지지 않는가. 이전에도 결코 말 한 마디,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따라서, 저 당시 필자에게는 "여왕님이 올해는, 세계챔피언이 될 마음을 단단히 먹었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으며... 이 느낌이 바로, 필자가 올 시즌 초부터 <연갤>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게 된...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여러 승냥이들과 더불어, 여왕님이 정상에 오르는 그 길을... 함께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  <세헤라자데>와 <Gold> ... 미리 예고하고 월챔 먹어 버리시는, 대단한 우리 여왕님~. (^^)


<죽음의 무도> 감상문에서도 밝혔듯이... 이미 정해진 이상, 필자는 <세헤라자데>에 대한 걱정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미지부터가 딱~ 인 데다가, <미스 사이공>을 경험했던 바가 있기에... 여왕님의 서정성을 이끌어 내는 <윌슨> 횽아의 안무 능력은 예전부터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SA>에서 공개된 첫 모습 역시, 필자로서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워낙에 걱정이 많았던(?) <죽음의 무도>에 비하자면, 그리 강렬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필자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다만, 당시 여왕님의 연기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는데... 워낙에 대작이었기에, 첫술에 배부르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고 할 것이다.

올 시즌 내내, 여왕님의 <세헤라자데>는 매번 점점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져서... 볼 때마다 즐거움이 더해지는 것도 또다른 행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 <월드>에서의 <세헤라자데>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아깝게 클린을 놓치긴 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봐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 필자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프로그램이라고 하겠다. (<죽음의 무도>도 물론 좋지만, 아무래도 FS 가 볼거리가 더 많은 데다가... 필자는 여왕님의 피겨 마임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여왕님의 <세헤라자데>를 볼 때면, 필자는 <샤리야르> 왕의 짖궂은(?) 시선이 되어 보려고 노력한다. (노력한다고 해서, 잘 되겠냐만은... ^^) 목표란 고작 "살랑살랑 이전까지는, 헤벌레~ 하지 않기~" 이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도통 이게 잘 안된다. 시작하고 불과 몇 초 뒤의 휙~ 뒤돌아보는 안무에서부터 벌써 두근~ 해 버리고 마니... 에고 에고, 필자 또한 약도 없는 승냥이임이 분명하다. (^^)

뭐, 더이상의 얘기는 필요치 않을 듯 싶다. 이제 그만 <2부>에서 여왕님의 <세헤라자데>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

 

(<2부>에서 계속...)